조선학교의 역사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만들어낸 사회적 산물입니다. 식민지 지배가 없었다면 많은 수의 조선인이 도일(渡日)하거나 강제 연행당해 일본에 머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된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시작과 더불어 일자리를 찾거나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많은 조선인들이 생겨났고, 1945년까지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들의 수는 약 240만 명을 헤아립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하고 조선은 독립합니다. 재일조선인은 즉시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자녀들에게 조선말과 조선역사와 조선의 문화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으로 돌아갈 희망을 품고 학교를 세우고 조선어 교과서를 만들고 재일조선인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부모가 학교를 운영했으며, 이 모든 것은 본국정부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민족학교가 일본정부의 규제를 받지 않고 이러한 민족교육을 자유로이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2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고, 1948년 1월부터 일본정부의 민족학교 탄압이 시작됩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연맹(조련) 결성과 더불어 일본 전국에 흩어져 설립된 <국어강습소>가 <조선학교(민족학교)>로 발전되어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고,전체 학교 수는 350여개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조선의 독립과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학교의 교육이 자본주의 진영과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교육으로 비쳐졌고, 식민지 조선인의 모습에 익숙한 일본은 독립한 조선인의 모습과 활동이 우려되었고, 민족학교 확산에 위기감을 느낍니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로 일본이 연합국 점령에서 독립하자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의 일본국적 상실을 공포하고, 외국인으로 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일조선인의 법적지위를 바꾼 이 변화로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을 외국인이면서 일본 국적을 가진 자로 취급했고, 이 때문에 재일조선인 자녀들은 일본학교에 의무적으로 취학해야 한다고 규정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조선인학교 창설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1946년 9월에는 525개 초급학교와 4개 중학교, 12개 청년학교가 설립되었고, 조련(재일조선인연맹)이 교육 방침을 정하고, 조선학교를 체계화시킵니다.

1947년 6월, 조련은 <교육규정>을 제정하고, 민족교육의 행정과 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방침을 확정, 일본 전역에 생겨난 조선인학교의 공통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1946년 9월 현재, 525개 초급학교(아동 42,182명, 교사 1,022명), 12개 청년학교(학생 714명, 교사 54명)의 학교 망이 만들어졌고, 조선어 교과서를 사용하는 교육이 시작됩니다.

1947년 여름 <학교관리조합>이 만들어지고, 그때까지 학부형이 부담하던 학비를 학구 내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이 부담하는 형태로 바뀌어 민족교육이 모든 재일조선인의 공동사업으로 발전합니다. 같은 시기 ‘재일조선인교육자연맹’이 결성돼 조선인 교육의 충실, 교사의 생활 안정과 실력 향상, 일본인 교사와의 연대 등을 도모합니다. 

조선학교(민족교육)의 발족은 식민지시대 일본의 동화교육에서 해방되어 조선어(우리말)를 교육하고 배울 수 있는 재일조선인의 간절한 희망이 실현된 것입니다.재일조선인은 궁핍하고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합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조선학교 건립과 운영에 힘을 쏟았던 이유는, 자녀들의 교육을 생활 향상이나 출세의 수단이 아닌 일본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조선인임을 자각하게 하고 교육으로 변화시키는 수단이자,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으로 존재하는 문제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조선학교를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1948년 4월 20일 일본 정부는 민족학교에 대해 일본의 교육법령에 따라 교육할 것을 지시함과 동시에 재일조선인 자녀는 의무적으로 일본학교에 취학해야 한다고 통지하고, 조선학교 폐쇄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4월 24일 고베와 오사카에서 교육투쟁(한신교육투쟁)이 일어났습니다. 재일조선인들 1만 명이 참여한 대집회가 열려, 현청(県庁)과 부청(府庁)을 에워싸고 강력히 반발했고, 고베에서는 미 제8군이 비상사태(계엄령)를 선언, 군인들을 동원해 집회를 해산시키고 2천여 명의 조선인을 체포했습니다. 이때 경찰이 쏜 총에 16세 김태일 학생이 사망했습니다.

1949년 9월 8일, 일본 정부가 <단체 등 규정령>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조련(재일조선인연맹)을 강제로 해산시킵니다. 문부성은 같은 해 10월 19일, 조련이 경영하는 것으로 간주한 90개 조선학교에 대해 일제 폐쇄명령을 내립니다.

조선학교에서 쫓겨난 아이들은 대부분이 일본학교로 전학. 달라진 교사와 교과서, 일본아이들의 차별에 시달려야 했고, 진로에 대한 벽과 일본인 교사들의 차별대우를 감수해야 했으므로 휴학하거나 등교하지 않는 아이들이 급증했습니다.

그러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에 대해 일방적으로 ‘일본 국적’을 상실시켰고, ‘일본 국적’을 근거로 시행된 1948년 1월의 학교교육국장통지는 효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따라서 재일조선인 자녀에 대한 일본인 학교 취학의무는 없어지게 되었고, ‘외국인’으로 분류된 재일조선인은 해방 후 7년이 지나서야 민족학교를 설립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