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동희망학교 4강을 맡아주신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는 재일조선인 3세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서를 내기도 한 분입니다. 

오늘 교수님은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해 4.24교육투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4.24 교육투쟁은 냉전과 분단을 둘러싼 세계사적 상황과 연관되어 살펴봐야 하며 특히 해방 직후의 시기를 들여다 보는 것에서부터 이해를 요청합니다. 

1945년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 200만 중 귀환하고 남은 60만명 가운데 8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 역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당시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학교의 숫자도 많아 525개의 소학교가 있었습니다. 해방 직후 5만명이란 많은 학생들이 일본에서 배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학교의 교육은 그대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일본이 1934년 각의결정한 ‘조선인이주대책요목’을 통해 드러나듯 조선인을 되도록 만주국이나 북쪽으로 이주하게 하는 한편 일본 내 조선인은 ‘내지융화’시키도록 하면서 민족교육을 하는 조선학교들은 폐쇄되고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조선학교의 역사는 이렇습니다. 해방 이후 민족단체들이 결성되었고 재일본조선인연명 즉, 조련이 결성되었으며 민족교육에 주력했습니다. 지바의 건물 창고에서 시작된 국어강습소가 조선학교의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이후 국어와 역사, 사회교육 등 교육의 영역이 확대되었고 자생적인 민족교육의 틀을 세워나갔습니다. 

일본의 전후 교육법과 당시 일본정부의 인식을 살펴보면, 조선학교 아이들 역시 일본의 의무교육 대상으로 보았지만 이미 많은 수가 조선학교 교육을 받고 있었기에 상황을 살펴서 조치하고자 했으며 조선학교 신설 인가도 무방하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이후 1948년 문부성이 발표한 이른바 ‘1.24 통달’은 조선인설립학교를 기본교육으로서 부정하고 불법화하면서 폐쇄명령을 내립니다. 

4.24는 바로 이러한 학교폐쇄령에 대한 반대투쟁에서 승리해 그 철회를 이루어 낸 날입니다. 하지만 미 점령군은 이를 폭력과 불법이라 선포하고 계엄령까지 선포해 수많은 ‘조선인 사냥’을 자행합니다. 항의과정에서 김태일이라는 소년이 일본 경찰의 발포로 사망하기 까지 합니다.

미국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당시 미 점령군 당국에게 4.24 교육투쟁은 5.10 총선거를 방해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반미폭동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한편의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도 공산분자의 책동이라고 발표하는 등 냉전의 색안경 앞에 혼란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결국 48년 5월 조련과 일본문부성은 타협책으로 각서를 교환하였고 이후 2차 학교폐쇄 등으로 수많은 조선학교는 폐쇄되고 여러 갈림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정영환 교수는 4.24 투쟁이 계속된 식민주의와 냉전의 폭력이자 민족교육과 교육자주성을 의식화하고 조선반도를 포함한 전국적인 연대가 형성된 중요한 저항운동을 상징한다고 평가합니다. 단순한 교육투쟁을 넘어 해방과 평화운동이기도 하며, 더욱이 재일조선인이 처한 지금의 현실에서 아직 그 투쟁은 끝나지 않았기에 더욱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강의에는 재일조선학교 학생도 찾아주었고 대학생 청년들과 활동가들이 고민도 함께 나누며 재일조선인 교육에 관한 더 많은 배움의 기회를 만들어보자는 결의로도 이어졌습니다. 

다음주 김복동의 희망은 김복동장학금을 전하러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오사카로 향합니다. 그래서 한 주를 쉬고 그 다음주에 ‘재일동포 청년과 젠더의식’이라는 특별한 주제를 가지고 다시 알찬 강의로 돌아옵니다. 계속해서 함께해 주세요. 

– 7월 12일 : 휴강
– 7월 19일 : 5강 재일동포청년과 젠더의식 (리이슬 조선학교 인권교육 강사)

장소 : 광화문 변호사회관 10층 조영래홀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 160번지. 광화문역 8번 출구 300미터)

문의 010-9893-1926, hope_bokdong@naver.com 
※ 일시후원 / 국민은행 069101- 04- 224446 (김복동의 희망)